송광사 알기
‘송광사’ 하면 누구나 얼른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곳은 전북 완주군의 종남산(終南山) 송광사이다. 물론 두 절은 전혀 별개의 사찰이다. 하지만 아무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글은 물론 한자로도 ‘松廣寺’라고 같게 표기하고 있으니 필시 무슨 연유가 있으리라는 짐작쯤은 아무라도 해봄 직하다. 송광사의 역사를 기록한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옛날 고려의 보조국사가 전주의 종남산을 지나다가 한 신령스런 샘물을 마시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장차 절을 경영하고자 했다. 마침내 사방에 돌을 쌓아 메워두고 승평부(昇平府, 지금의 순천시)의 조계산 골짜기로 옮겨가 송광사를 짓고 머물렀다. 뒷날 의발(衣鉢)을 전하면서 그 문도들에게 이르길 “종남산의 돌을 메워둔 곳은 후일 반드시 덕이 높은 스님이 도량을 열어 길이 번창하는 터전이 되리라” 했다. 그런데 수백 년이 지나도록 도량이 열리지 못했으니 실로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스님 등이 서로 마음으로 맹세하되 보조스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정성을 다해 모연(募緣)하니 뭇 사람들이 그림자 좇듯 하였다. 이에 천계(天啓) 임술년(1622) 터를 보고 방위를 가려 땅을 고르고 풀과 나무를 베어내며 산과 바위를 깎아 가람(伽藍)을 이룩하였다.
결국 보조스님과 인연이 닿아 있어 그 뜻을 받들다보니 절 이름까지도 같게 되었다는 얘기다. 아울러 우리는 이 비문 내용을 통해서 송광사가 조선 후기에 창건되었음도 알 수 있다. 비의 이름 자체가 ‘개창비’인 데다 그것을 건립한 해도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이니 이 사실에 착오가 있을 리는 별로 없어 보인다. 한데 절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전혀 엉뚱하다.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 가지산문의 제3조 보조 체징(普照 體澄, 804~880)선사가 송광사를 창건했다는 얘기다. 심지어 어떤 기록에는 체징스님의 할아버지뻘 되는 가지산문 개창자 도의선사를 창건주로 꼽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통일신라시대 창건설은 아무런 문헌적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를 뒷받침하는 유물이나 유적 또한 현재로선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아마 체징스님과 지눌스님의 호가 같고, 여기에 자기 절의 역사를 가능한 한 올려보려는 생각이 더해져 이와 같은 주장이 제기된 것이 아닌가 한다.
송광사는 종남산 아래 널찍하게 펼쳐진 수만 평 대지 위에 터를 잡고 있다. 이른바 평지사찰이다. 평지사찰로서의 특징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일주문 앞에 서기만 해도 금세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있어 이들 각 건물의 문들이 틀을 만들며 점차 작아지다가 열어놓은 대웅전 어간문 안의 어둠 속으로 수렴된다(다만 현재는 1998년 완공한 대웅전 앞 석탑이 대웅전 어간 일부를 가리고 있다). 엄정성을 읽을 수 있는 정연한 구조이다. 산지사찰과는 판이하게 다른 진입방식이요, 가람배치이다. 당연히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이 십분 고려된 것이겠지만, 옛 백제지역 사찰들이 보여주는 평지성의 면면한 전통을 여기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다. 천왕문을 넘어서는 순간 어딘가 휑뎅그렁한 분위기가 우리를 덮친다. 날이 선 엄정성이 절 전체로 파급, 확장되는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대웅전의 앞뒤로 흩어져 있는 전각들-십자각, 지장전, 관음전, 첨성각, 오백나한전, 약사전, 삼성각 등-은 너른 대지 위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 말 그대로 ‘흩어져’ 있는 모양새이고, 하나의 점 혹은 파편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저 낱낱의 건물이 고립분산적으로 독립해 있을 뿐 건물들 상호간에 어떠한 유기적 연관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건축이 생활을 담는 그릇일진대 과연 이런 건축 구조와 수행공동체를 지향하는 불가의 생활방식이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적이 의심스럽다.
송광사 건축의 이러한 분산성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조선 후기에 창건된 탓인지 유감스럽게도 송광사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십자각을 제외하곤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강하게 비끄러맬 만한 것이 없다. 말하자면 어느 건물도 이렇다 할 구조의 미 또는 공예적 장식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셈이다. 이럴 경우 그 약점을 보완, 수정하여 강점으로 환치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집합성이다. 별볼일 없는 것들이 기능적으로 결합될 때 생겨나는 힘, 그것은 이를테면 군집의 미, 집체의 미, 그리고 조화의 미일 텐데, 송광사 건축은 애석하게도 이런 미덕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산지가람이라면 덜 드러났을 고립성, 분산성이라는 구조적 결함이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훨씬 강하게 노출되어 그 황량함이 두드러진다.
그러면 송광사의 가람배치가 창건 때부터 지금과 같았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을 설정하고 그 선 위에 가지런하게 건물들을 배치한 점으로 본다면 그밖의 건물들도 어떤 원칙과 조형 원리에 입각해서 위치가 정해졌을 법하다. 물론 추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야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아무튼 지금의 송광사는 건물군이 보여주는 짜임새에서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음에 틀림없고, 최근에는 이런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 가속화되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창암 이삼만이 글씨를 쓴 편액이 인상적이던 명부전을 헐고 지장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더 크게 새로 지으면서 집을 오른쪽 뒤편으로 훨씬 물려 앉히는 바람에 다른 건물과의 연계성을 더 떨어뜨린 점이라든지, 건축적 고려 없이 마당 가운데 세우면서 중심축을 벗어난 석탑이라든지, 국적 불명의 쌍석등을 난립시키는 따위가 모두 그런 경우이다. 요즘 사람들의 즉흥성과 안목 없음을 탓할밖에 별 도리가 없으니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대개 이상과 같은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송광사를 돌아본다면 공연한 실망을 덜 수 있음은 물론 소소한 재미와 소득이 없지는 않을 터이다.
절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 일주문은 다포계 맞배지붕 양식이다. 조선시대 다포계 건물의 경우 대체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공포의 생김새가 나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하여 공포뿐만 아니라 서까래와 덧서까래, 창방 뺄목 대신 고개를 내민 용머리, 문의 앞뒤로 덧댄 보조기둥 따위들이 모두 유난히 가늘어 일주문의 인상을 섬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런 섬약함 때문인지 일주문의 또 다른 인상은 일종의 가벼움이다. 어딘가 모르게 진득하게 땅에 몸 붙이고 있는 자세가 아니라 쉽게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기둥이 의식되지 않고 포작에 받쳐진 지붕만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이다.
송광사 일주문절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로 기둥이나 여러 부재들이 유난히 가늘어 섬약해보이는데, 그 때문에 포작에 받쳐진 지붕이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금강문을 지나 사천왕문 안으로 들어서면 여느 절집처럼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여기 사천왕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塑造)이다. 흔히 이곳 사천왕상을 소개하면서 뛰어난 사실성과 세부 묘사의 성실성을 언급하지만, 글쎄 그게 다른 천왕상들과 뚜렷이 드러날 만큼 차이가 큰지는 모르겠다. 흙을 이겨서 4m가 넘는 신상을 조성하면서 이 정도 성실성을 보여준다는 점은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 사천왕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제작연대가 분명하다는 점 때문이라 해야 솔직하리라. 오른손으로는 당(幢)을 잡고 왼손 위에는 보탑(寶塔)을 올려놓은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쓰고 있는 보관의 뒷면 끝자락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畢”(순치기축육년칠월일필)이라는 먹글씨가 남아 있어 1649년에 이들 사천왕상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조선시대 소조 사천왕상의 기준작을 얻게 된 셈이고, 이 점이 송광사 사천왕상이 갖는 의의라 하겠다. 1997년 보물 제1255호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사천왕상흙으로 빚어 만든 4m가 넘는 거대한 사천왕상이다. 사진의 오른쪽에 있는 서방 광목천왕의 보관 뒤쪽에 1649년에 조성했다는 연대가 남아 있어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기준작이 되고 있다.
천왕문을 넘어서면 중정이고 그 너머 정면으로 대웅전이 우람하다. 대웅전은 송광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이다. 절이 창건될 무렵 처음 지어졌고, 1857년 중건되었다. 꽤 큰 건물이다. 외관에 걸맞게 기둥이 튼실하고 훤칠하다. 그런데 어쩐지 처마가 깊지 않아 집 전체의 조화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니다. 제대로 조화가 맞았더라면 장중한 맛을 한껏 드러냈으련만 도리어 점잖은 도포 차림에 양태 좁은 갓을 쓴 것마냥 어딘지 어색하다. 처음 세울 때는 2층이었으나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고쳐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 연유로 건물 각 부분의 비례가 적정치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물리고 그 위로 공포를 올려 다포집 전형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 집의 특색은 그 아래에 있다. 즉 정면의 창방과 상방 사이 공간을 벽면으로 처리하고 각각의 칸을 균등하게 셋으로 나눈 다음 칸칸이 벽화를 채운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다. 보통은 여기에 빗살무늬 교창을 둔다.
송광사 대웅전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 규모가 매우 크고 튼실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천장의 꾸밈새가 다채롭다. 천장은 가운데 3칸은 우물반자를 치고 나머지 외진부는 경사진 빗천장을 꾸몄다. 불상 위 천장에는 간단한 운궁형 보개를 씌웠으며, 우물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 하늘을 나는 동자, 반자틀에 붙인 갖은 물고기·게·거북 혹은 자라 따위 바다짐승 등 온갖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개중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론가 바삐 줄지어 가는 자라, 새끼를 등에 업고 네 활개를 젓는 거북도 눈에 띈다. 빗천장에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추는 모습의 비천도 20여 장면이 천장화(天障畵)로 그려져 있다. 19세기 중건 당시에 완성된 것들로 생각되는데, 비교적 색채도 선명하고 활달한 동세가 구김살없이 표현되어 눈을 즐겁게 한다.
법당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불상이 되겠다. 중앙에 석가, 동쪽에 약사, 서쪽에 아미타여래가 삼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흙으로 만든 이 불상들은 각각의 높이가 5.5, 5.2, 5.2m나 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소조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분들은 그 크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법당 안이 그들먹하다. 때문에 불상과 천장 사이의 공간은 여유롭지 못하고, 수미단과 앞면 기둥열의 간격이 좁아 예배 공간은 옹색하며, 수미단조차 3단이 아닌 2단으로 낮추어 만드는 편법을 구사하고 있다. 공간 활용이 이렇게 비합리적임을 무릅써가며 이만큼 불상을 크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지 의아스럽다. 혹 법당이 2층이었을 때에는 그런대로 집과 어울렸을까? 모를 일이다.
송광사 소조삼존불각각의 높이가 5m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소조삼존불이다.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불상에서 땀이 흐른다고 전한다.
근년 도난사건이 빌미가 되어 삼존불의 복장유물(腹藏遺物)이 수습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세 불상에 똑같은 내용으로 납입된 「불상조성기」(佛像造成記)이다. 그 가운데 “이 불상을 만드는 공덕으로 주상전하는 목숨이 만세토록 이어지고 왕비전하도 목숨을 그와 같이 누리시며, 세자저하의 목숨은 천년토록 다함없고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며, 봉림대군께서는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또한 환국하시기를 ······ 원하옵니다”(以此造像功德奉爲 主上殿下壽萬歲 王妃殿下壽齊年 世子邸下壽千秋 速還本國 鳳林大君增福壽 亦爲還國 ··· 之願)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로써 우리는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함도 이들 불상 제작 배경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의 서글픈 장면 하나가 일견 세상과 무관한 듯한 불상에조차 화인(火印)처럼 남은 것이다. 또 조성기 첫머리에 불상을 만든 때를 밝히면서 ‘崇禎十四年’과 ‘崇德六年’(1641)이라고 명(明)과 청(淸)의 연호를 나란히 기록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는 혼란기에 명, 청 양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약소국 조선의 딱한 처지도 손금보듯 읽어낼 수 있다. 대웅전 삼존불은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가감없이 고스란히 간직한 불상이라 하겠다.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전패(殿牌) 또는 원패(願牌)라고 불리는, 조각이 아름다운 목패(木牌) 세 개가 서 있다. 왕, 왕비,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원패이다. 셋 모두 크기가 2m가 넘어 전패치고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화염을 날리며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용무늬가 복잡하게 전체를 뒤덮고 있는 앞면은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인다. 뒷면에는 인조 때 만들었다는 것과 정조 때인 1792년 수리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먹글씨가 남아 있다. 크기로나 새긴 솜씨로나 또 만들어진 연대가 드러난 점으로나 눈여겨봄직한 유물이다.
그동안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던 대웅전은 1996년 보물 제1243호로 등급이 승격되었고, 삼존불상과 그 복장유물은 1997년 보물 제1274호로 새롭게 지정되었다.
절 건물 가운데 범종, 목어, 운판, 법고의 네 가지 법구(法具), 곧 사물(四物)이 비치된 곳이 범종각 혹은 범종루이다. 엄격히 구분한다면 종각은 단층, 종루는 누각 형태의 2층을 가리킨다. 송광사에는 대웅전의 남서쪽, 현재는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의 비스듬한 앞쪽에 범종루가 있다. 우리 전통건축에서는 아주 드문 십자형 평면을 채택하여, 누마루를 경계로 아래위 동일선상에 12개씩의 누하주와 누상주를 세우고, 그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짜올린 대단히 독특한 외관을 뽐내는 건물이다.
송광사 범종루우리나라 건축물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십자형 평면을 가진 건물로 부재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매우 섬약하나 수많은 기둥과 처마밑의 빼곡한 공포로 인하여 현란하고 화사한 느낌을 준다.
바닥이 지면과 별 차이가 없는 누각 아래층은 주춧돌과 기둥을 제외하면 거칠 것 없이 열린 구조이고, 그 서북쪽 귀가 만나는 곳에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이 걸렸다. 사물이 걸려 있는 누각은 면마다 돌아가며 간결한 계자난간을 돌렸다. 누마루의 중심을 이루는 4개의 기둥에는 기둥을 휘감고 솟아오르는 용을 그려넣어 돋보이게 장식을 하였다. 기둥 위로는 창방을 건너질렀는데, 대들보 없는 이 건물에서 그 구실을 겸하고 있다. 평방 위로 짜올린 공포는 가냘프게 휘어올라간 앙서형의 살미, 두께가 얄팍한 첨차 등 하나하나 뜯어보면 매우 섬약하다. 또 서까래와 덧서까래도 가늘고 길어 연약해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울림은 전혀 다르다. 기둥 사이의 간격이 2.5m, 따라서 한 면의 길이가 7.5m에 지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집에 귀공포가 여덟 군데나 놓이고 기둥 사이마다 주간포를 짜올렸으니 처마밑은 공포로 빼곡하여 섬세하고 현란하며 화사하다. 공포를 구성하는 낱낱 부재가 가볍다보니 그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느낌도 가뿐하고, 산뜻하고, 날렵하다. 마치 범상한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고된 훈련 끝에 부르는 화려한 합창 같고, 보잘것없는 풀꽃들이 가득 모여 이룬 커다란 군락 같다. 밀집한 공포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한 본보기를 여기서 만날 수 있다.
종루는 1857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함께 중창된 것으로 전해온다. 종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96년 ‘완주 송광사 종루’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244호로 승격되었다. 십자형 평면으로 말미암아 십자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대웅전을 옆으로 비껴 절의 동북쪽 귀퉁이로 빠져나가면 절의 내력이 적힌 ‘송광사개창비’를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내쳐 걸으면 긴 돌각담에 둘러싸인 이 절의 부도밭이 나온다. 송광사개창비는 절의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 세워졌다. 거북받침,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는데 거북받침은 화강암, 몸돌과 지붕돌은 대리석 통돌이다. 비머리의 앞면에는 ‘全州府松廣寺開創之碑’(전주부송광사개창지비), 뒷면에는 ‘賜號禪宗大伽藍寺’(사호선종대가람사)라고 전서(篆書)로 제액(題額)하였고, 그 아래로 앞뒷면에 글씨가 빽빽하다. 글을 짓고 전서를 쓴 사람은 선조의 부마였던 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 1588~1644)이고, 글씨는 선조의 여덟째아들 의창군 광(義昌君 珖)이 썼다. 이미 대웅전 삼존불의 조성 경위에서 우리는 송광사와 왕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음을 짐작한 바 있지만, 국가에서 ‘선종대가람’이란 이름을 내리고 왕실과 가까운 사람들이 비의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런 점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송광사 개창비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에 세워진 비로 불교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고려 보조스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사찰 건립의 배경과 과정, 둘째는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스님이 창건에 깊이 관여한 사실과 그분의 면모 및 고려 말의 태고 보우(太古 普愚)스님으로부터 스님에게까지 이어지는 법맥(法脈)의 상세한 계통, 그리고 셋째는 벽암스님의 문도, 창건에 동참한 시주자와 기술자, 비석 제작에 참여한 장인의 명단이 그것이다. 특히 벽암스님의 존재가 주목된다. 그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1624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면서 3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한 승병장이기도 하다. 스님은 송광사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서, 무주 적상산성에서 사고(史庫)를 지키던 중 대중들의 요청이 계기가 되어 대웅전 삼존불의 조성을 비롯한 갖가지 송광사 불사에 참여한다. 그의 지위나 직책으로 보아 송광사와 왕실을 연결하는 매개자였으며 불사의 주도자 또는 후견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또 비문 속의 스님에게까지 이어지는 전법(傳法)의 계보는 불교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돌각담이 정겨운 부도밭은 너무 넓은 탓인지 아늑한 맛은 없다. 뒷줄에 열둘, 가운데 둘, 그리고 앞줄에 둘 해서 모두 열여섯 기의 부도와 두 개의 비가 세 줄로 나란히 서 있다. 부도들은 모두 석종형으로 별다른 특징은 없고, 다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여러 점 눈에 띈다. 푸근한 맛은 없지만 세월을 벗하며 서 있는 부도들이 맑은 바람 속에서 해바라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송광사는 진입부의 정연함과 중심부의 산만함이 기묘한 대비를 이루는 사찰이다. 진입부에서 가졌던 기대와 긴장이 중심부에서 여지없이 풀려버리는 그런 곳이다. 건물과 건물이 짜임새 있게 맞물려 돌아가야 거기에 생활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음을 교훈적으로 보여주는 절이다. 설사 여러 점의 유물이나 유적이 가치 있고 볼 만하더라도 그것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못하면 그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없음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송광사이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다. 전주객사 앞에서 다시 충경로 사거리로 나와 왼쪽 전주 시내로 난 1번 국도를 따라 1.3㎞ 가면 진북광장 오거리가 나온다. 진북광장 오거리에서 다시 오른쪽 모래내·전주역 방면으로 난 길을 따라 1.7㎞ 가면 안골광장 사거리가 나오고, 안골광장 사거리에서 앞으로 계속 난 길을 따라 1.2㎞ 가면 우아교차로가 나온다. 우아교차로에서 앞으로 계속 난 26번 국도를 따라 진안 방면으로 5.3㎞ 가면 황운교차로에 닿는다. 황운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2.6㎞ 가면 마수교를 앞두고 길 왼쪽에 송광사·위봉사 표지판과 함께 741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741번 지방도로를 따라 2.5㎞ 가면 길 오른쪽 앞에 한마당슈퍼가 있는 사거리가 나온다. 한마당슈퍼 앞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작은 다리를 건너면 송광사에 닿는다. 대형버스는 한마당슈퍼 앞 사거리 100m 정도 못미처 왼쪽으로 난 다리를 건너면 송광사 앞까지 갈 수 있다. 송광사 주차장은 대형버스도 여러 대 주차할 수 있다. 송광사 주변에는 숙식할 곳은 있으나 그리 마땅치 않다.
전주 시내 모래내 사거리에서 송광사로는 14-1, 37, 38, 106, 106-1번 시내버스가 약 30분 간격으로 다닌다.
알찬 답사,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① 송광사 입구 마수교에서 진안으로 계속 이어진 26번 국도를 따라 약 3.5㎞ 가면 화심온천에 닿는다. 화심온천은 중탄산나트륨이 함유된 알카리성 온천으로 피부미용, 신경통, 관절염 등에 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화심온천에서는 숙식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순두부촌이 형성되어 있다. 화심순두부는 순수한 국산 콩에 재래식 제조방법으로 만드는데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어서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두부의 명소이다.
② 송광사 입구 마수교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2.5㎞ 구간에는 길 양옆으로 해묵은 벚나무가 우거져 있다. 이 길은 봄에는 만개한 벚꽃들로 온통 흰 터널이 되며, 가을에는 붉은 벚나무 단풍 터널이 되어 장관을 이룬다.